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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리뷰 혹은 리뷰어를 위한 시대유감
우쒸  2009-08-27 22:34:06, 조회 : 705, 추천 : 169

서태지다.  

통산 7번째 음반이 나왔고, 예외없이 각종 언론과 온-오프를 막론한 세상은 다시 한번 3년 4개월 동안 묵혀두었던 서태지를 향한 갖가지 이야기를 양산해내며-집착하기도 혹은 이용하기도 하면서-들썩인다.


서태지라는 이름을 보통명사의 범주에 두어 공적인 코드로 읽어낼 것인가, 아니면 한명의 뮤지션이라는 범주에서 사적 소담론의 영역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서태지’를 말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취해진 편의상의 갈래에 가깝지만, 언론과 평단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행해진 소위 ‘서태지론’은 지나치게 전자에 기울어져있다. 사회적인 화두로써의 서태지가 전자라면 뮤지션으로써의 서태지는 후자가 된다. 물론 두 코드를 한꺼번에 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동시에 손쉬운 방법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사실 한사람의 리뷰어가 제대로 녹여낼 수 있을 만큼 시시껄렁하거나 녹록한 문제가 아니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이도 드물거니와 설사 그런 이가 있다 하더라도-전문적인 뮤지션인 동시에 통찰력있는 인문학자인, 엄연히 서태지를 해석하는 수많은 ‘개별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청자 혹은 독자들에게는 그 두 범주들간의 밸런스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균형잡힌 역동적 구조안에서 대중들은 개별적인 해석들 사이를 비집고서 정보수집과 판단이라는 몫을 원활하고 건강하게 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에 이르기까지 거쳐야할 세심한 디테일을 견뎌내지 못하고 명백하게 편의적이며 자의적인 판결내리기에 능숙해져버린 평론가들과, 그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문화에 대한 단선적이고 경직된 인식틀안에서 아직도 부유하고 있으며, 여전히 시기상조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서태지 혹은 그의 음악을 포함한 서태지로 대변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서태지라는 이름이 갖는 사회역사적인 맥락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작 자신은 '대중이나 평론가들의 평가를 염두하지 않고 스스로 가장 즐기는 음악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33세의 이 젊은 음악가의 본의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지나치게 많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거나, ‘애정어린 비판’ 내지는 ‘서태지 역할론’등을 앞세워 스스로가 가져야할 책임의식에서도 노골적인 회피를 감행한다.  때문에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현 국내음악판의 ‘서태지책임론’은 사실은 많은 구조적 문제점들을 서태지라는 담론에만 안착하여 무임승차하려는 ‘서태지기생론’에 다름아니며, 서태지에게 끝없이 투사로써의 사회적 역할을 종용하는 일부 평론가들 역시 사회적인 제의미로 착각된 그들만의 환상으로 서태지를 재단하면서 인상(impression)에 가까운 비평들을 쏟아내며 서태지라는 이름에 기대어간다.  


뮤지션의 범주로 서태지를 해석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문제가 크다.  
진정성이나 통찰력이 의심되는 전자의 문제점은 그나마 양적인 풍성함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후자에 오게되면 그나마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더군다나 전문음악인들의 다양한 검증없이 자의식에 매몰된 유토피아적 일루젼을 서태지에게 지속적으로 투사시키며 소모되는 리뷰어들의 에너지들은, 에소테릭한 자괴감을 넘어서 뿌리깊은 서태지컴플렉스를 느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인상’과 ‘수사’의 '악용' 내지 '낭비'는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소리나 음원의 배열에 대한 강박"과 아티스트로써 작품에 대한 열의 내지는 고통스런 연구작업은 무슨 차이가 있으며, "좋은 멜로디와 듣기좋은 멜로디"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스스로도 제시하지 못하는 헛헛한 수사들로 채워진 리뷰들은 차라리 삼류 쇼비니즘에 더욱 가까워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음악에는 일천하고 청자로써의 스타일에만 천착된 리뷰어’들은 설익은 병리학 혹은 심리학적 용어들을 아무 고민없이-그야말로 민망할 정도로 나열해놓은 후, 다시 19세기식 프로퍼갠더(propaganda)에 가까운 터프함과 20세기 초반에도 못미칠 '선병질적 자의식' 사이를 대단히 순진하게 배회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론적 백그라운드를 내보이는 것도 아니다.


전문적인 엔지니어링, 작곡법, 연주법에 문외한인 내가 서태지의 7집에 대해 음악적 운운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어불성설이며, 감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런 스스로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건드릴 수 없는 부분과의 경계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쯤은 ‘기본’ 이전에 ‘양식’에 가까운 것이다. 웹상의 적지않은 리뷰어들의 문제점은 ‘청자(listener)로써의 양식’에도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이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최소한의 정보제공이라는 일차적 소임에 있어서도 무능력에 다름 아닐 핍진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결국 ‘리뷰어-독자’간의 소통 자체를 알량한 차원으로 분산시켜버린다는 데에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이른바 ‘문화대중’들의 관심은 ‘훌륭하다’ 혹은 ‘불량하다’ 차원의 판결을 요구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평론가들의 심판관에 가까운 역할에도 흥미가 없어 보인다. 심판관 역할에 급급한 건 그들 자신 뿐이다.
오히려 대중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관심영역 안으로 파고든 텍스트들이 ‘어째서 훌륭한가?’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견해들에 더욱 쏠려있으며, 그 견해들이 충분한 깊이와 납득할만한 퀄리티를 지니고 있는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러한 양질의 전문적인 견해들이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드러난 평론가들의 안일한 자세들을 질타하며, 매니아적 욕구충족을 위해 “이제 비평은 여.기.서. 우.리.가. 하.자.”를 외쳤던 대중들의 선언은 시대가 바뀌다보니 어쩌다 일어난 이벤트성 공갈이 아니라, 지난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평단을 향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촉구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긴 시간을 들여 자신만의 텍스트를 리서치해가는 문화대중들을 ‘명민한 한줄’로 무마시키려는 욕심은 평론가들의 환상안에서나 가능하다.  


하루 10시간을 꼬박 음악에 투자하고도, 앞으로도 ‘보여온 것보다 보여줄 것’이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서태지를 해석해내기엔, 현재 리뷰어 혹은 평론가들은 그들의 학습역량 뿐 아니라 열정과 진정성에 있어서도 의심을 살 여지가 농후하다.  발맞춰 갈 능력은 고사하고 뒤따라갈 힘조차도 부쳐 보이는 상황을 대중들은 그리 긴 시간동안 참고 기다려줄 것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비판문외’란 타이틀은 늘 대중에게만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사족> “평소 평론가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는 질문에
          첼리스트 장한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평론가들요?    저보다 음악에 쏟는 시간이 적으니까 별 신경 안써요”





                                              "같은 시간 또 다른 생명 "            우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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