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자유정담 ::사진 ::음악 ::기사 ::후원회 ::바그다드카페 ::Dear T ::공지

나의 25년
  (Homepage) 2017-10-02 19:29:13, 조회 : 222, 추천 : 8


* 정리하다 보니 엄청 길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공연에 대한 화답으로 시작한 거라 올려봅니다. *


25주년 기념 공연 후... 계속 마음에 남은 말이 있다.
나의 25년, 너의 25년..
그랬다. 공연은 그의 25년, 나의 25년.. 우리의 25년을 여행할 기회를 선사했다.
이후 작은 기억들이 난데없이 찾아왔다.
나의 25년, 참 많은 기억들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가 건넨 ‘너의 25년은 어땠니?’란 질문에 화답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우리 나이로 40살, 그러니까 서태지가 등장했을 때 나이가 15살이었다.
참 긴 시간이었지만 되도록 간략하게 정리해보려 한다.

<1992년>
나는 전교생이 좋아하던 서태지와 아이들 팬이 아니었다.
나는 시골 여자중학교에서 촌닭이란 별명을 가졌고
참으로 재기발랄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그저 학교생활만 충실히 하면 되는 줄 알던 모범생이었다.
그럼에도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르면 간첩이던 시절이었다.
실제 첫 방송은 아니었지만 첫 방송으로 알려진 특종TV연예도, 갖가지 음악방송도, 인간극장이니 몰래카메라니 하는 많은 방송을 실시간으로 접했다.
야영에 가니 형광색 가득한 옷을 입은 친구들이 서태지와 아이들로 분해 장기자랑을 했다.
반마다 모두 같은 곡으로 장기자랑을 했던 장면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몸치에, 음치에 심지어 서태지와 아이들에 관심이 없었던 나이지만
그 당시 체육 실기시험으로 조별 댄스를 해서 친구들에게 토끼춤을 배웠었다.
친구들이 열심히 가르쳐도 실력이 늘지 않는데 정말 끈기 있게 연습하는 걸 보고 그들이 끈기를 인정해줬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어설프지만 토끼춤은 흉내낼 줄 알고, 몇 년 전 셔플댄스가 유행했을 때 꽤나 반가웠다.

<1993년>
93년 6월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종TV연예로 복귀했고 습관처럼 TV를 보던 나는 이 방송이 끝난 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하여가라는 곡의 뮤직비디오 때문이었다.
뭐 이런 곡이 다 있나 하는 의문과 함께 앞으로 서태지라는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학교에서 유명한 서태지 팬으로 서서히 성장했다.
하교 후 들른 문구점엔 힙합 소년 서태지 엽서도 있었고 어느 날은 빨간 수트를 입은 서태지 엽서도 있었다.
엽서, 스티커 등을 사는데 용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TV에 서태지가 나오면 비디오 녹화하는 법도 배웠다.
처음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오신 아빠는 마이마이라는 물건을 선물로 사오셨다.
마이마이에 2집을 넣고 들으며 우리들만의 추억 영어랩을 그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 외우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서태지 가사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서 첫 가사 devastating부터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까지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서태지는 그렇게 내게 왔다.

<1994년>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자의식이 조금씩 커가던 내게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은 촉발제와 같은 것이었다.
사회비판의식이 들어있던 3집은 나의 서태지에 대한 팬심뿐 아니라 사춘기 소녀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함께 건드렸다.
늘 표지를 장식했던 잡지를 사기 위해 서점에 갔고, 서점에 가면 책도, 시집도 욕심이 났다.
잡지를 보면 서태지 인터뷰가 있었고 그가 추천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서 음반점에 가서 테입을 샀다.
처음 듣지만 그가 좋다던 핑크플로이드, 펄잼과 같은 해외밴드 테입도 사고, 신해철, 강산에 같은 국내 락씬의 음악도 즐겨 들었다.
나의 빠심은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에겐 힘든 시절이었다.
백워드 매스킹, 테입을 돌리면 사탄을 찬양한다고 했다.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일 같았는데, 뉴스에도 나오고 참 시끄러웠다.
당시엔 왜 내가 좋아하는 서태지가 2집 때보다 TV에 자주 안 나오는지 몰랐다.
그냥 스타쇼에서 서태지가 부른 ‘얼음나라 공주 스위밍 스위밍’을 따라 부르고, 문구점에서 산 발해왕자님 사진을 보며 뿌듯해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콘서트를 했다. 우리 학교에서도 가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서울에서 하는 콘서트까지 갈 용기를 못 내고 내년을 기약했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이 나왔다.
첫 방송이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나는 TV앞에 앉아 시험 공부하겠다고 책을 펴놓고 있었다.
그들은 또 다른 음악을 들고 왔다.
3집보다 방송을 더 많이 했지만, 일부엔 삐~소리도 났고 아예 가사가 실리지 않은 곡도 있었다.
시대유감이 심의에 걸리자 아예 가사를 빼고 음반에 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나 역시 천자 원고지 몇 장을 쓰고, 친구들에게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내가 그를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서태지로 인해 사회에 저항한 첫 일이었다.
시대유감은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이 떠난 후 가사를 붙여 발매할 수 있었다.
서태지의 필승 패션은 파격적이었다.
카운트다운 TV광고 속 모습도 너무 예쁘고, 어느 날 서울에서 한 게릴라 공연 장면도 눈이 시리게 예뻤다.
사서함이 바뀌는 날이면 밤마다 2892를 누르고 스케줄을 듣는 게 즐거움이었고
이제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나도 서태지를 직접 볼 날이 있으리란 기대에 설레었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한단다.
그 겨울, 은퇴한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부터 은퇴하던 그 날까지..
참으로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곧 수험생이 될 예비 고3이었고 시골의 비평준화고등학교였던 우리학교는 그 겨울 보충수업에 야간자율학습까지 빠듯한 스케줄이었다.
나도 이번엔 콘서트 가려고 했는데 이제 음악도 안한다고 선언해버렸다.
TV속에 나오는 은퇴기자회견 장면에 서태지의 눈은 빨갰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뱉어내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울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다는데 이제 그를 우리는 놓아줘야 했다.
은퇴 후 영상집을 만든다고 공모를 했다.
우리학교의 유명한 서태지 팬들이 모여서 선물상자를 만들었다.
하얀 티셔츠에 색 스프레이를 뿌려 글씨를 썼고 졸망졸망 작은 선물들을 넣었다.
서태지에게 보내는 내 첫 선물이었다.
그리고 서태지에게서는 인연 영상집과 굿바이베스트앨범이 우리에게 왔다.

나의 영웅을 그렇게 보낸 96년, 나의 고3은 참으로 황량했고 힘들었다.
시골의 비평준화 고등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문과, 이과 우수반을 따로 편성했다.
이과 우수반이었던 우리 반은 번호마저 성적순이었다.
2학년말 당시 반편성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그저 편의상 번호를 그리 매겼다는 사실은 지금도 안타깝고 슬프다.
밤12시까지 그리고 일부는 새벽 2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학교는 내게 못 견디게 힘들었다.
내게 교실이데아를 들려준 서태지는 떠났지만 그가 알려준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그대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일탈도, 반항도 하지 못하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특별한 일탈도, 반항도 하지 못하니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무기력뿐이었다.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고3 생활을 한 나에게 나의 모교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캄캄한 동굴로 기억되었다.
그 캄캄한 동굴 안에서도 내가 생기 있게 학교를 누볐던 기억도 있다.
점심시간에 방송반에서 서태지 음악을 틀어주면 3학년 교실이 있던 3층, 4층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교과서니, 정석이니, 문제집이니 써 놓은 내 이름 앞에는 “Yo!”가 붙어 있었고
그 황량했던 고3시절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우리 담임선생님은 대체 “Yo!”가 무엇인지 물어보곤 했다.
20년이 더 지난 내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서태지와 내가 했던 문학동아리만 생각이 난다.

<1997년>
고3 생활을 헛되이 보낸 나는 대학을 가는 것보다 재수를 택했다.
사춘기가 오래 간 것인지, 갑갑한 입시제도와 서열매기기에 예민했던 탓인지..
나의 뜨거웠던 재수기간 역시 쉽지는 않았다.
낯선 서울에서 참 많이도 방황했다.
어느 날은 학원을 빼먹고 아침부터 한강에 가서 앉아 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충정로에서 시청까지 무작정 걷기도 했다.
그 방황의 기억 속에서도 서태지에 대한 기억은 있다.
당시 리모델링으로 다른 곳으로 이전해 있던 우리 학원은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성균관대학교 강의실을 빌렸다.
달마다 유림회관을 보게 됐다.
TV로 본 그곳, 그들이 떠나던 그곳.
서태지가 눈이 빨개져서 울음을 삼키며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갔었다.
그곳을 볼 때면 내 마음이 먹먹해졌다.
따뜻한 봄에도, 그 더운 여름에도, 그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에도..

<1998년, 1999년>
나는 대학신입생이 되었다.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지만, 아주 우연적으로, 충동적으로 이과에서 문과로 전공을 바꾸게 됐다.
그리고 그 때의 선택이 지금의 내가 되어있기도 하다.
나는 특별한 목표도, 대의도 없는 신입생이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깔깔거리고 술을 마셨던 기억밖에는 없다.
공부도 안했지만, 딱히 그렇다고 특별히 동아리에 매진하거나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지만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을 테다.
잔디밭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숙사 닫는 시간이 지나 캠퍼스 내를 서성이다 추워서 대자보를 떼어 덮기도 하고..
90년대말 운동권 학생회가 저물 무렵, 전사련(전국사범대연합) 전국대회가 우리학교에서 열려 운동권의 ‘ㅇ’도 모르는 내가 얼떨결에 무대에 올라가 문선을 하기도 했던 것..
그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참 별 볼일 없는 내 삶에, 서태지 5집도 조용히 왔다.
우리 과에서 호프를 하던 날이었다.
그가 접어 보낸 날개, 설레는 마음으로 음반집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받았고..
보라색 씨디 속 음악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우리 태지, 잘 있구나..
그뿐이었다. 별 볼일 없는 내 삶에 작은 보탬 하나, 보라색 씨디. 날개.

<2000년>
나의 일상은 다름이 없었다.
저학년에서 고학년이 되었을 뿐, 학교 코앞에 살면서 게으름을 피우다 지각하는 횟수가 늘었을 뿐.
여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태지가 돌아온단다. 나의 영웅, 서태지..
공항으로 들어오는 서태지, 그 공항을 가득 채운 팬들을 TV로 보았다.
서기회부터 PC통신,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던 나는 그 수많은 팬들은 어떻게 알고 저 자리에 있는 걸까, 궁금하고 부러웠다.
추석 연휴에 컴백 공연이 있었다.
표를 어떻게 구하는지도 잘 몰랐던 나는, 공연 이후 TV방송으로 그를 보았다.
빨간 레게머리, 그리고 하드한 음악.
그가 돌아왔다. 매우 강렬하게..
인터넷이 도입되던 시절이었으나, 나는 아직 인터넷을 잘 모를 때였다.
다시 사서함을 열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가을이 되어서야 인터넷 세계에 발을 들였고 그 때 내가 유입된 곳이 태지매니아 사이트이다.
팬들이 사전녹화를 참 치열하게 다녔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갔다.
태지매니아에선 Board보다 Community가 눈에 먼저 들어와서 커뮤니티에 정착했다.
아이디로 소통하는 세계에 입문했고 온라인 팬질에 서서히 적응했다.
내가 정착한 ‘1972+’클럽은 알고 보니 조금은 연령대가 있는 이들의 모임이었다.
그 후 나의 이십대는 그 곳의 언니, 오빠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나도 이제는 공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대전 공연 티켓팅을 했다. 당시는 은행에서 기다려 티켓팅하던 시절인데, 그 티켓을 어떻게 구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방 공연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구했나 보다.
공연은 한 번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전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월 31일엔 밤샘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 날 고등학교 절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친구가 MBC PD집 아이 과외를 해서 공연티켓이 생겨서 공연장에 왔다고 했다.
태지공연에 가니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단다.
지금도 당시 무심하고 소극적이었던 내 팬질이 때로 아쉽다.

<2001년>
2001년 1월, 내 인생 최초로 서태지 공연에 가게 되었다.
방학이라 고향인 제천에서 대전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대학을 다니며 거의 매주 타던 기차인데, 그 날의 차창 밖 풍경과 설렘은 여전히 생생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기찻길을 달려 공연장에 도착했다.
사이트에서 공부한 바에 따르면 공연장 안에서는 반팔을 입어야 하고, TV로 본 모습은 열심히 헤드뱅잉을 하는 것이었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반팔로 기다렸다. 머리 긴 예쁜 언니들도 모두 그랬다.
공연장 안에서 공연 경험이 많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공연 초짜인 내 덕분에 친구가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태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헤드뱅잉도 해야 하고 잘 놀기도 해야 했다.
공연장 안에서 우연히 청주에서 온 팬도 만났다.
그리고 청주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나는 그 버스를 타고 청주에 갔고, 청주 카페에 가입했다.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서태지 모임을 알게 된 셈이다.

공연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 해 2월 앵콜 공연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딱 두 번의 ‘태지의 화’ 공연을 갔는데, 그 오래 전 기억이 아직도 몇 장면이 생생하다.
휴대폰 조명이 없던 시절, 우리는 라이터를 켜서 들고 있었고..
태지 안에 하나인 그 느낌이 참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96년 헬기를 타고 떠나던 영상을 틀어주는 엔딩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당시 겨우 이십대 초반, 별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온 나는 난생 처음으로 통곡을 했다.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96년 1월 그 때도 울지 않았던 내게, 사실 서태지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태지의 화’ 앵콜 공연은 또한 내가 DVD에 나온 공연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 공연을 참 많이 갔지만, 이때만큼 크게 클로즈업된 적도 없다.
엔딩 장면에서 내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땀인지, 눈물인지를 닦고 있었고..
카메라는 아마 그 분을 담고자 했던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던 내가 같이 잡혔다.
(당시엔 아저씨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태지매니아 사이트에 그 분이 직접 후기를 올리셔서 당시 30대, 치과의사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태지의 화’는 VCD와 DVD를 모두 발매했는데, 당시엔 DVD가 흔하지 않아서 VCD만 구입했었다.
후에 중고로 DVD를 구입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 때 구매해둔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2001년 6집을 마무리했던 시점이었지만 그 때쯤 온, 오프라인으로 팬들을 알게 된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겼다.
청주 카페는 정모를 할 때면 대학교 근처 술집을 통째로 빌렸다.
서로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으며 서태지 음악을 틀어놓고 헤드뱅잉을 하고 놀았다.
십대후반부터 이십대 중반까지 여자도, 남자도 많았다.
어떤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을 한 후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고
어떤 친구는 과거를 회상할 때 ‘중2때’가 아닌 ‘서태지 3집때’라고 표현했다.
정모도 다양한 술집에서 여러 번하고, 서태지 생일이면 케이크를 사와서 주인공 없는 생일파티를 했다.
우리 모임에서 한 친구가 우리 대학 축제 가요제에 나가서 ‘울트라매니아’를 불렀고 우리는 응원가서 헤드뱅잉을 하며 응원했다.
당시 분위기에 휩쓸려 무대까지 올라가 헤드뱅잉을 했던 추억을 아직도 이야기한다.
상을 받은 후 또 정모를 했다.
우리는 구호도 만들었다. ‘절대지존 서태지, 청주매니아 파이팅!’
밤에 헤어질 때면 밤에, 몇 차를 이어져 해장국 먹고 아침에 헤어질 때엔 새벽에 구호를 외쳤다.

태지매니아도 정모를 했다.
태지의 사촌이 한다던 퀸즈나인에 갔던 기억이 난다.
특히 ‘1972+’클럽의 언니들은 정말 따뜻했다.
각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온라인으로 마니또도 했다.
그 마니또 덕택에 나는 2000년의 노란 손수건을 얻었다.
서울부터 부산까지, 중간에서 만나자며 여러 분들이 청주에 온 적도 있다.
우리학교 잔디밭에 모여 풋풋하게 정모 겸 소풍을 즐겼다.
나는 태지매니아의 언니들로부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내 인생의 스승은 태지와 그리고 태지팬들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재수라는 사람이 컴백홈을 패러디했다며 컴배콤이라는 곡을 냈다.
태지팬들은 분노했고 저작권을 위해 싸웠다.
그 여름 나는 발산역에서 내려 걸었고 한국저작권협회가 있다는 빌딩 앞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있었다.
대학 신입생 때 얼떨결에 문선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저작권협회 빌딩 앞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서 침묵시위를 했던 기억, 그것이 내 최초의 시위에 대한 기억이다.
고등학교 때 공윤 철폐를 위한 서명운동 이후 두 번째 저항의 경험이었다.

여름에 서태지는 일본 섬머소닉 락페스티벌에 출연했다.
팬들은 전세기를 띄우고 가까운 팬들도 일본으로 태지를 보러 갔지만
나는 여전히 소심했다.
그 당시 해외를 가본 적 없는 나는 일본까지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월, 서태지는 또 다른 놀라운 일을 보여줬다.
서태지닷컴이라는 눈이 휘둥그래해지는 사이트를 선보였고, ETP(Eerie Taiji People) 페스티벌을 열었다.
신비한 느낌이 나는 외계인 라그랑티와 넘버링이 달린 후드집업을 구입해 입고 갔다.
서태지는 나오지 않는 공연이었다.
일본에 있는 서태지를 위성으로 연결한 위성콘서트였다.
화면으로 보는 서태지도 좋았다. 이곳에 있는 팬들과 그곳에 있는 서태지가 소통했다.
서태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당시는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사이트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군 지역의 시골학교에서 시 지역의 학교로 전학했다.
그래서 5학년 때까지 다닌 학교 친구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친구들을 만나게 됐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는 술도 자주 마시고 엠티도 갔다.

2001년에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사범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내가 신입생일 때 우리 도에서 영어교사를 딱 한 명 뽑았다.
임용고사라는 게 와 닿지 않았고 본다고 붙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시기였지만, 내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자꾸 생겼다.
당시 김대중 정권에서 학급당 인원수 감축을 행했고, 내가 졸업하던 이 해에 상당히 많은 교사를 뽑았다.
하지만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가 붙을 리는 없었다.

<2002년>
내 인생에 적을 둘 곳이 없었던 때가 두 해이다.
한 번은 대학을 재수할 때, 그리고 또 한 번은 임용고사를 재수할 때.
졸업하던 해에 갑자기 교사를 많이 뽑으면서 많은 선배, 동기들이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달리 특별한 재주가 없었던 나도 임용고사라는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8월까지는 아르바이트로 어학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임고가 가까워진 9월부터는 학원 강의를  그만두고 서울로 임고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녔다.
새벽 다섯시에 아침으로 선식을 먹고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가서 학원 강의가 끝나면 길거리 샌드위치를 사 먹고 청주로 내려오는 식이었다.
학원, 인터넷 강의, 그리고 도서관, 3달 정도는 그래도 열심히 한 듯하다.

그런데 기억의 조각을 맞추어 보니, 2002년에 나는 공부 말고도 했던 일이 참 많았다.
2001년, 2002년의 기억이 섞이고 있는데 아카이브나 검색으로 찾아보면 순서가 이러한 듯하다.
우선 ‘이것은 서태지가 아니다’가 개봉했다.
우연히 2000년 서태지가 돌아오던 공항에서 서태지의 팬들을 본 감독이 그 이후 서태지팬들을 쫓아다니며 찍은 필름이다.
그 뜨거운 현장에 나는 없었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대유감을 목 놓아 부르던 공항의 모습도, 공연이 끝난 후 그 흥을 이기지 못해 본인들끼리 미친 듯 놀고 있는 모습도..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가까웠다.
치열하고 뜨거운 서태지 팬들이었다.
아트선재를 찾아가던 정동 근처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내 모습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햇살이 나만을 향해 비추는 것 같았다.
서태지를 향하는 길은 그렇게 ‘내 자신’, ‘내 자아’를 찾아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청주 카페에서는 정모에 이어 엠티도 갔다.
‘태지의 화’ VCD나 태지 관련 물건을 상품으로 해서
조별로 ‘가족오락관’처럼 게임도 하고 서태지 코스프레 경쟁도 했다.
당시 나는 그런 이벤트를 만들고 진행하는 것을 좋아했었나 보다.
게임 내용을 짜고, 엠씨를 맡아 진행도 했다.
허참 아저씨처럼 긴장감도 조성했다가 태지관련 퀴즈를 위해 전화찬스도 쓰게 해줬다.
전화찬스로 매니아 누나를 둔 친구가 있는 조가 많은 문제를 맞추었다.
펜션에 있는 물건들로 조별로 한 명씩 서태지 코스프레를 할 때엔 배꼽잡고 웃었다.
우리는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깔깔댔다.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의 엠티에선 다 함께 경기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렇다. 2002년은 월드컵의 해였다.
어학원에서 근무했던 나는 단 한명의 수강생이 출석해 미국전을 못 봤다.
마지막 독일전은 영화관에서 봤다.
이탈리아전은 친구들과 학교 대운동장에서 보다가 공이 잘 안보여 쉬는 시간에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우리집으로 왔다.
우리집은 대학 근처 번화가였고, 골든벨이 터지던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집을 뛰쳐나갔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 해 여름을 그렇게 보냈다.

그 해 10월엔 제2회 ETP가 열렸다.
10월 25일, 26일.
첫 날은 매니아페스티벌과 전야제, 둘째 날은 본공연이 있었다.
내가 자주 가는 두 모임, 청주 카페와 태지매니아의 1972+ 모두 매니아페스티벌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 부스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이젠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엔 오랫동안, 열심히 준비했다.
매니아 동생의 집에 가서 오리고, 붙이고.. 깔깔거리고..
매니아페스티벌 당일 나는 두 개의 부스를 왔다 갔다 했다.
전야제는 소박했다. 넬이라는 새로운 밴드를 보게 됐다.
잔잔하게 곡을 부르는 도중, 갑자기 서태지가 등장했다.
나는 왜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서 죽는 사람이 발생하기도 하는지 깨달았다.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태지를 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본공연이 있었던 10월 26일은 내 생일이었다.
내 생일에 공연이라니 꿈만 같았다.

나는 이 해 겨울 임용고사에 합격했다.
나름 도서관도 다니고 친구와 스터디도 했지만, 여기저기 놀러다니느라 완전한 수험생 모드가 아니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1차 합격자 발표일에 나는 놀란 친구의 전화를 받아 잠에서 깼다.
친구는 2차 시험 준비가 안 된 나를 걱정했다.
지난해에 비해 좀 더 많은 인원을 뽑고, 이런 저런 운이 닿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2차 시험도 통과했고 얼떨결에 교사가 되었다.

<2003년>
나는 나의 모교로 발령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학생들과는 8살 차이가 났다.
아이들과 상담하다 보면 아이들도 실수로 언니라고 불렀다가 놀라기도 했다.
많이 어설픈 신규교사였지만 모교에 근무하고 계시는 여러 은사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사실 나의 모교는 떠올리면 내게 깜깜한 동굴 같은 곳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도 그 때의 그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교사가 되었지만 야간자율학습에, 보충수업에 그 빡빡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햇살 같은 아이들과 지내면서 나의 모교는 깜깜한 동굴 이미지는 벗어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이제는 그들도 서른이 훌쩍 넘어 함께 나이 먹어가고 있다.

그 해 학교에선 ‘사제가요제’라는 행사를 했다.
노래도, 춤도 잼병인 내가 아이들과 무대에 올라갔다.
아이들은 ‘성인식’을 하길 원했고, 나는 ‘울트라매니아’를 고집했다.
두 곡을 모두 하는 것으로 하고 맹연습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을 해도 몸치인 내가 ‘성인식’ 안무가 될 리가 없었지만 아이들을 믿고 흉내만 냈다.
그리고 울트라매니아 무대는 강당 안에 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워낙 재주가 없어 이후로 달리 무대에 오를 일이 없었던 내게 창피하지만 즐거웠던 추억이다.

신규만 13명 발령이 날 정도로 젊은 교사가 많은 학교였다.
나는 같은 학년의 젊은 담임선생님들께 제안해 락페스티벌에 갔다.
이티피는 열리지 않았고, 이제는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로는 큰 페스티벌이었다. (아마 ‘게이트인서울’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도 문화충격을 받았다.
야외이지만, 대걸레 빨아 놓은 쉰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던 경험이었는지 그 중 두 명의 선생님과는 2004년 이티피에 함께 가기도 했다.

그렇게 교사로서의 첫 해가 흘러갔다.

<2004년>
2004년 1월 서태지가 7집을 냈다.
이모코어를 표방한 그는 외국 그룹 콘과 합동공연을 하며 컴백을 했고, 처음으로 동생을 공연에 데려갔다.
동생은 공연이 끝난 후 청주 카페 단체사진을 찍어 줬다.
덕분에 라이브와이어 공연을 기억할 수 있었다.

4월엔 라이브와이어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었고, 5월엔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연이 있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엔 친구 결혼식이라 못 갔고 블라디보스톡 공연은 학기중이라 생각조차 못했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었다.
하고자 하면 모두 할 수 있는데, 여전히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여름엔 전국투어를 했다.
처음엔 서울 공연으로 시작했지만 바로 이은 부산 공연에 가고 싶어졌다.
태지매니아 사이트에서 알게 된 언니와 손 꼭 붙잡고 부산 공연을 봤다.
다음번에도 꼭 부산공연엔 오자며 너스레를 떨었는데, 언니와는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9집까지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
나는 제천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원주와 충주 공연은 놓칠 수 없었다.
원주공연은 엄마를 모시고 갔다.
구한 공연이 좌석이었는데 후에 엄마 말씀이 잠깐 앉아있더니 ‘나 좀 놀게’하며 벌떡 일어나서 놀더란다.
그 공연을 다녀온 후 엄마는 서태지가 제천에 오는 꿈도 꾸셨다.
익산도, 수원도 가고 싶었지만 당시 고3담임이었던 나는 조금 진정하기로 했다.
앵콜에서는 태지가 ‘내가 더 사랑해’ 컵 이벤트를 했다.
태지와 팬들은 서로를 참 많이 아꼈다.

그리고 한 달 뒤, 제3회 이티피가 열렸다.
전 해에 락페스티벌에 함께 갔던 두 명의 선생님과 동생이 동행했다.
10월에서 8월로 옮겨진 이티피는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렸고
우리 팬들은 여전히 예뻤고 여전히 싱그러웠다.
당시 물품보관소는 비닐봉지에 가방, 옷가지 등을 넣어 차례대로 세워두었다.
‘저 쓰레기는 뭐야?’라고 질문을 시작했던 동생에게 04이티피는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음악과 7집~9집 음악이 좋다는 동생에게
6집 음악과 긴 머리 풀어헤치고 헤드뱅잉을 하고 슬램을 하는 분위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듯 하다.
이후 동생은 9집 컴백공연 전까지 서태지 공연에 가지 않았다.

2004년은 서태지 데뷔 15주년이 되는 해였다.
넘버링된 한정판 15주년 기념앨범이 나왔고 15주년 기념관 전시, 15주년 기념 공연도 했다.
기념관에서는 팬들이 보내준 종이학을 모아 전시해 화제였고, 15주년 기념공연에 서태지는 나오지 않았다. 후배들이 리메이크하여 부르는 형식이었다.
종이학 전시는 꽤나 감동적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당시에는 TV속 연예인이었고, 5집, 6집 카리스마 있었던 서태지가 좀 더 강렬했던 내게, ‘내가 더 사랑해’컵 이벤트와 종이학 전시는 태지의 팬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빅팀은 심의로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
태지팬들은 빅팀을 살리기 위해 또 다시 투쟁했다.
많은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첫 기억이었다.

태지매니아 사이트는 여러 모로 힘들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서태지와 서태지팬들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서태지팬들은 늘 똑똑했고 자랑스러웠다.
6집 태지매니아, 태지존 시절에도 늘 팬사이트에서 논박이 오고갔지만,
7집 당시 태지매니아가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은 아프게 남아있다.
태지매니아는 정치적인 의견 대립과 스토커 사건 등으로 피흘리며 싸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당시 많은 팬들이 떠나가며 그 화려했던 태지매니아가 조금씩 쓸쓸해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나는 고3담임이었다.
겨우 2년차였던 나는 여전히 좌충우돌이었지만, 고등학생일 때처럼 늘 밤까지 학교에 있고 방학도 제대로 없는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처음으로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갔다.

<2005년, 2006년>
나는 인문계고등학교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제천은 지방소도시라 다른 어느 곳보다 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했고 방학 보충수업도 빡빡했다.
2005년엔 다시 고3담임이었고, 2006년엔 싸우고 애걸하여 2학년 담임을 했다.
해마다 아이들의 느낌은 달랐지만, 비평준화인 도시에서 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은 참 예쁘고 싱그러웠다.
2006년 여름방학 때는 연수를 받았다.
교사한지 3년이 되면 2급 정교사에서 1급 정교사가 될 수 있는 연수를 받는다.
나는 분명 대학 다닐 때, 별 목적도 없고 지각하고 공부 안하던 학생이었는데, 그 여름의 한 달 연수가 참 재미있었다.
단 몇 년 차이인데도 교수학습방법 자체가 많이 달라졌고 조별 활동이 중요시되고, 스스로 동기가 생겨 학습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얼떨결에 영어과를 가고 얼떨결에 교사가 된 내가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었다.

다양한 국내 락페스티벌을 다녔다.
쌈싸페니 렛츠락, 그리고 해외 내한 밴드 공연도 챙기게 되고 뮤지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음악을 듣고 공연을 다니고, 또 영화를 보는 것.
나는 언제나 혼자서도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이러한 일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2007년>
여전히 입시에 목을 매고 아이들은 밤까지 공부하고 교사들은 밤까지 근무하는 것이 당연한 모교를 떠나고 싶었다.
대학을 다녔던 청주로 학교를 옮겼다.
영어교사가 받을 수 있는 6개월 연수를 신청하며 옮기는 거라 중학교를 희망했는데 다시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비평준화 여자고등학교에서 4년을 근무한 내게 새로운 학교의 첫 한 학기는 이른바 멘붕이었다.
아이들은 개성 넘쳤고, 내가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단 한 학기 담임이었는데 교직생활 중 가장 버라이어티한 한 학기였다.
물론 그만큼 고운정도, 미운정도 많이 들었다.
2학기엔 소망하던 6개월 연수를 받았다.
5개월을 한국에서, 1개월을 미국에서 수업도, 생활도 모두 영어로 하는 방식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이과였고, 대학 다닐 때도 굳이 영어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던 나에게 이러한 심화과정은 처음이었다.
충분히 배우고 소통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내게 그 때의 생활은 행복 그 자체였다.
서울에서, 대전에서, 그리고 저 멀리 울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온 선생님들과 소통하고 배웠다.
한 달의 미국생활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조금씩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2008년>
몇 년간 소식이 없었던 서태지가 드디어 컴백했다.
모아이라는 제목의 곡과 싱글을 발매했고, 컴백방송 사전녹화와 코엑스에서 게릴라공연이 이어졌다.
사전녹화 운은 언제든 없었고, 게릴라공연은 먼저 생긴 약속을 취소하지 못해 가지 못했다.
게릴라 공연은 스케일이 컸고, 이후 공개한 뮤직비디오도 케이스가 남달랐다.
서태지는 칠레 이스터섬에서 진짜 모아이를 찍어왔다.

그리고 곧 이어 이티피가 있었다. 4년만이다.
2008년 이티피는 야구팀이 런던올림픽에 가서 처음으로 야구장에서 하게 됐다.
그리고 그 날의 이티피에 서태지가 등장하던 때엔 아주 인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전 무대가 끝나고 무대 세팅하던 시간, 그곳에 있던 우리들은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땐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단다.
4년 만에 서태지와 만나던 그 때,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서태지는 또 다른 큰 공연을 선사했다.
영국의 작곡가 톨가 카시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서태지심포니였다.
심포니 공연을 앞두고 이런저런 좋지 않은 기사들이 나왔다.
이전에도 순위프로그램 폐지, 방송심의 등 여러 가지 일에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태지매니아는 악의적 보도를 하는 언론사를 향해 메타비평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해 내 옆자리엔 교직원노동조합의 간부였던 분이 앉아계셨는데,
서태지 관련해서는 투쟁정신이 폭발하는 나를 참 신기하게 바라보셨다.
언론이 어떻게 대응하든, 서태지의 공연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친한 친구 결혼식이라 들렀다가 서둘러 올라간 상암에서의 심포니 공연에선 선선한 바람과 선율이 어우러졌다.
서태지를 좋아하게 되어서 나는 이런 멋진 공연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날 교실이데아를 부르던 서태지는 이런 말을 했다.
‘처음 교실이데아를 가지고 나온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현실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만들어갈 그 세상을 믿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교실이데아를 듣던 예민했던 고등학생이 이제 입시로 가득 찬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얼마만큼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나는 공연에서 돌아온 다음 월요일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가입한다고 내가 뭘 특별히 한 것도 아니지만, 좀 더 제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자리 선생님은 나의 조합 가입 계기를 듣고 서태지 세대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사실 그 해 내가 그 선생님과 만나게 된 것은 앞으로의 교사로서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좀 더 다른 시선과 패러다임을 갖게 됐다.

그 해엔 소고기 수입으로 광우병 위험을 걱정하며 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는 어른들보다 청소년들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사실 어른인 나는 학교생활과 팬질에 정신없어하고 있었지만, 개성 있고 활동적이었던 우리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언론 등에서는 노동조합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언제적 얘기인지 모를 프레임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
처음 교사가 될 2003년부터 이른바 진보가 집권당이었던 나는 조금씩 달라지는 학교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서태지폰이 출시됐다.
알람음이 무려 서태지 음성이고 뒷면에는 사인도 들어 있었다.
장기간 쓰던 통신사를 해지하고 서태지폰이 되는 통신사로 옮겼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설렜고 서태지폰 소지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12월엔 심포니 앵콜 공연이 있었다.
이번엔 영국 팀이 아닌 한국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체육관 공연이었다.
또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 복장으로 대절버스를 탔다가 환복하고 달려갔다.
친구들은 또 서태지에게 달려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불평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닌 서태지의 공연이었기에.

사이사이에 심포니 덕수궁 기자회견도 있었고, 이적 라디오 출연도 있었다.
덕수궁 기자회견은 그 날이 학교 축제라 못 갔고, 라디오는 그 다음날이 학교 소풍이라 못 갔다.
사전녹화 추첨운은 늘 없었다.
그랬던 나였기에 명동에서의 게릴라 공연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추첨되지 않아도 줄 서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월요일이지만 연가를 내고 일찍 서울로 향했다.
12월에 밖에서 기다리는 일은 추웠다.
오들오들 떨다 보니 공연시간이 다가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엔 명동을 걸어 다닐 수 없었다며, 본인은 왜 그런지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고 피해 다니고 하는 일이 힘들었다는 고백.
휴먼드림을 부르는 하얀 재킷의 서태지는 신나는 음악만큼이나 밝아보였다.
명동은 내 스무 살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그냥 걸었고 내 젊음을 소비하던 그 시절의 명동.
늘 많은 것이 공존했던 그곳답게 한 쪽에선 서태지가 공연을 하고 구석에선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든 기독교인이 ‘서태지 믿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서태지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12월 31일에 팬들을 초청하는 ‘쫄핑크파티’라는 이름을 가진 연말파티였다.
총 네 가지 응모방법이 있었는데, 나는 네 가지에 모두 응모했다.
그 중 하나는 쫄핑크댄스를 추는 댄스를 찍은 UCC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청난 몸치인데, 네 가지 모두에 응모해야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았다.
매니아 동생과 몸빼 바지를 입고 비어 있는 대학 강의실을 전전하며 찍어 올렸다.
팬 친구들은 네 가지 모두에 응모한 내가 갈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떨어졌다.
공연에서 그냥 엽서 하나 넣은 매니아인 친구 남편은 됐는데, 나는 안 됐다.
상심이 컸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컴퓨터도, 휴대폰도 켜지 않았다.
남편 따라 파티에 갔던 일반인 내 친구는 서태지 목소리 들려주겠다고 전화를 했지만 내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의 상심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8집 때 나의 팬질은 절정기에 이르렀다.

<2009년>
쫄핑크파티 이후 서태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체 이게 활동기가 맞는지 불평이 이어질 때쯤 새로운 이벤트가 시작됐다.
서태지가 실종되었다는 미싱 태지 이벤트..
2008년에 유에프오를 타고 나타난 서태지가 이번엔 실종 사건 이벤트를 벌렸다.
팬사이트에서는 며칠 동안 단서를 찾느라 분주했다.
서태지는 3월 14일, 15일에 올림픽홀에서 웜홀 콘서트를 열었다.
줄리엣, 버뮤다, 코마가 들은 새로운 싱글 앨범도 나왔다.
서태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듯 활동을 해나갔다.
나는 14일, 15일 공연에 모두 갔다. 유료공연이라면 나는 이제 빠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15일 공연 마지막에 그랬다. 오늘 집에 가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그의 말대로 MBC사전녹화 공지가 떴다.
나는 역시 다시 추첨에서 떨어졌지만 태지매니아 사이트에서 양도를 해준 분이 계셔서 갈 수 있게 됐다.
청주에서 일산까지 미친 듯이 달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녹화 시작 직전에 문 닫고 들어갔다.
서태지는 3일 내내 공연에 온 우리에게 ‘놀지 말고 일해’라고 말했다.
무대 위에 있던 서태지, 맨 뒤에 서서 보던 나..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이후 사전녹화 기회가 또 생겼지만 내가 갈 수 없는 사정이라 다른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시간은 흘러 전국투어가 시작됐다.
빠심이 절정에 달했던 나에게 전국투어 올출이 시작됐다.
때론 대중교통을, 때론 자가용을 이용해서 전국을 누볐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공연이 끝나면 돌아오는 순간까지 복습을 했다.
그 복습을 바탕으로 집에 가면 장문의 후기를 썼다.
어떤 날은 화장하다가도 잡히는 메모지에 생각나는 모든 것을 썼다.
참으로 치열하고 행복했던 여름이었다.
길었던 활동기간만큼, 깊어진 마음만큼 공연 다니는 순간순간에 많은 감정이 오고갔다.
‘아침의 눈’이 처음 공개됐던 용산의 ‘내일도 만나게 될까요?’ 전광판부터..
앵콜 전 마지막 공연이었던 광주 공연까지 참 많이 웃고 울었다.
공연을 많이 간 만큼 앞번호도 꽤 많이 얻게 되었고, 서태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티피가 있었고, 뫼비우스 투어 앵콜이 있었다.
이티피 홍보를 더 많이 하기 위해 팬들이 나서기도 했다.
이제는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 우리에게 이티피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페스티벌이었다.

청주 카페에서는 서태지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물품도 사고 카페 이름이 담긴 스티커 제작도 해서 붙이고, 통장을 하나 개설해서 문구를 만들어 통장편지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 편지 등까지 넣고 나니 바구니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지막 선물을 끝으로 화려했던 8집 활동을 마무리했다.

8집 활동은 연애를 한 것처럼 후유증을 남겼다.
그가 떠난 9월, 실연당한 사람처럼 헛헛한 마음 가지고 살아갈 때였다.
그 허전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한 모임을 만나게 됐다.
청주에서 교사독서모임을 만들고 싶었던 어느 선생님의 두드림에 답하게 됐고,
나는 그곳에서 평생지기가 될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다시 성장하게 됐다.
2009년 9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이 모임도 이제 몇 해만 지나면 10주년을 맞게 된다.

시절은 참 아팠다.
어느 비오는 날 밤 집에 도착한 주차장에서 코마를 틀어놓고 펑펑 울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소시민이라는 게 슬펐고 아팠다.

청주 카페에서는 흉가로 엠티를 갔다.
개그감 떨어지는 나와 달리 우리 청주 팬들은 입만 열면 웃겼다.
깔깔거리고 함께 술마시고, 모터바이크도 탔다.
태지가 왔던 곳이 우리에겐 성지였다.

그 해 가을 태지매니아에서 아이디로만 알고 있던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공백기에 웹진을 한 번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같이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별로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태지매니아에 일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함께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명의 아마추어가 모여서 시작한 게 웹진 태지매니아였다.
처음엔 게시판, 메신저 등으로 아이디어만 주고 받다가, 상상 속에만 있었던 인터뷰를 실제 하게 되었다.
이티피 주관사였던 액세스 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이 첫 인터뷰이였다.
홍대에서 만나 이야기가 길어지자 나는 막차를 포기했고 그때 함께 했던 에디터 분들이 홍대에서 같이 밤새주었다.
하다 보니 이런저런 꼭지가 만들어졌고 12월 6일에 첫 웹진을 오픈했다.
첫호를 오픈할 때에 이미 2호 인터뷰이 섭외가 되어 있었다.
당시 호주에 살고 계셨던 에디터 분께서 서태지 심포니 지휘를 했던 Tolga Kashif에게 서면 인터뷰 요청을 했고 허락을 받아 질문하고 대답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나는 직업의 특성을 살려 번역 작업을 맡았다.
지금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는 참 뭐든지 어설펐다.
여튼 그래서 그 해가 가기 전에 2호도 송년호로 오픈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최초로 적극적인 팬활동을 하게 되었다.

<2010년>
웹진 태지매니아는 처음부터 8집의 8곡, 즉 8호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처음의 소소한 시작에 비해 8호까지 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면에서 조심스러웠다.
한 호, 한 호 만들 때마다 어디까지가 팬들이 할 수 있는 선인지 치열하게 고민했고 우리끼리 논쟁도 많이 했다.
그리고 늘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 팬들의 반응에 민감했다.
인터뷰가 있으면 서울에 갔고, 번역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번역을 했고, 글을 써야 하면 글을 썼다.
실제로 서울에 간 횟수보다 인터뷰에 성공한 일이 적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방민이라 서울에 계시는 분들이 훨씬 고생을 많이 하셨다.
웹진을 내기 위해 모임에서 스키장에 가서도 콘도에서 컴퓨터로 일을 했던 기억도 있다.
웹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2010년에 정현절 축하 특별호인 3호부터 7호까지 낼 수 있었고, 마지막 8호는 2011년 정현절에 내기로 했다.
웹진 태지매니아는 산출물에 비해 팬들이 많이 칭찬해주었다.
아마도 아마추어이니까, 그리고 많이 쇠퇴했지만 태지매니아에 대한 마음을 열어준 것 같았다.
웹진을 하면서 나는 웹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서태지’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저 팬들이 만드는 건데, ‘서태지’란 이름만으로도 많은 분들이 수락해주셨고 우리에게 친절했다.
하여튼 1년이 넘었던 웹진 태지매니아 에디터 기간은 내게 평생 할 수 없었을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더불어 나는 태지매니아의 운영자를 맡게 되었다.
워낙 일할 사람이 없는 태지매니아였고, 변방인 데다가 나는 컴퓨터는 문외한이라 사실 이름뿐인 운영자가 된 것이다.

아직 8집은 끝나지 않았다.
뫼비우스 상영회가 서울, 부산에서 있었고 나는 일반인 동료들과 서울 상영회도 갔고, 부산 상영회도 간 기억이 있다.
참으로 서태지에 빠져있던 시간들이었다.

그 해 여름에는 학생들을 인솔하여 호주에 갔다.
바다 위를 솟아오르는 고래를 볼 때에는 ‘모아이’가 함께였고, 별이 쏟아지던 그 까만 밤에는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가 함께 했다.
시골 자매학교를 떠나 마지막 시드니에 갔을 때에는
줄리엣 뮤직비디오를 호주에서 찍은 서태지가 들른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게 서태지가 먹었던 아이스크림과 같은 거라며 학생들에게 자랑했다.
내가 서태지 8집 씨디를 우리 반 전체에게 선물했던 그 친구들이었다.

2009년, 2010년은 학교에선 영어교사로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시도했던 해이기도 했다.
인문계와는 조금 다른 학교라 ‘영어’라는 과목뿐 아니라 ‘영어청해’, ‘영어문법’, ‘영어독해’ 등을 학생들이 전공교과로 배웠다.
나는 영어청해, 영어문법, TEPS, 영어토론 등 다양한 수업 준비를 했고, 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영어일기, 리스닝 로그 검사를 했다.
돌이켜 보면 가장 대단한 팬질과 가장 대단한 수업준비를 했던 시기였다.
참으로 열심히 살아냈다.

<2011년>
나는 학교를 옮겼다.
학생들의 개성이 다양하고 교육과정 등이 자유로웠던 학교와는 달리 학급당 인원수가 40명이 넘고 수능 공부를 강조하는 학교였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고 야간자율학습도 참 길었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휴대폰 메신저며, 컴퓨터 메신저며 메시지가 가득차 있었다.
매냐 친구들에게선 ‘믿지 않죠?’라는 메시지, 일반인 친구들에게선 ‘괜찮냐?’는 메시지였다.
그 당시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우리는 서태지의 공식 입장이 있기 전까지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게 사실이라 해도 애써 담담하려 애썼다.
모든 팬사이트가 마비되었다. 다행히 태지매니아는 변방이라 괜찮았다.
그런데 다음날, 어떤 팬픽에 대한 기사 때문에 태지존 접속량이 늘어 태지존과 서버를 함께 쓰고 있는 태지매니아 사이트가 마비되었다.
일일 접속가능수를 늘리고 태지존의 팬픽쪽을 닫는 것으로 임시 조치를 하였다.
너무 큰 충격이었지만 잘 버텼는데, 태지매니아 사이트가 마비되던 날 서버비 담당하셨던 분과 통화하면서 무너졌다.
아무리 이름 알려진 연예인이라도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한 그저 선한 대중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 폭력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팬들은 불경까지 들으며 버텼고, 나 역시 그랬다.
수많은 감정이 오고갔고 감정적으로 힘겨웠던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서태지도, 팬들도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학교에선 3일에 한 번은 밤 10시, 또 다시 3일에 한 번은 밤 12시까지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했다. 고3은 주말에도 자습을 했다.
이래저래 피폐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 해 겨울 독서모임 선생님들과 함께 네팔로 떠났다.
네팔의 히말라야 자락의 오스트리안 캠프에서 봤던 밤하늘은 잊을 수가 없다.
과학관의 돔에서나 볼 수 있는 줄 알았던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몇 년 후에 네팔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가장 안타까웠던 건 내가 갔었던 박타푸르가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었다.
고대 도시인 박타푸르에선 내 휴대폰이 시간을 잃었었다.
시간이 초기화되었던 곳, 가이드 없이 함부로 헤매다가 길을 잃을 수 있는 곳,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 조각되어 있던 곳..
산골마을의 아이들의 미소가 아름답던 네팔에서의 기억은 나를 크게 성장하게 했다.

<2012년>
나는 피하고 싶었던 고3 담임을 다시 하게 됐다.
사실 당시엔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랐는데 이 학교를 떠난 지금 당시에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그래도 전 해보다 조금 적은 우리반 인원에 감사하며, 그 해 여름 수시 입시와 그 많았던 자율학습의 밤들을 버텼던 듯하다.

이 해는 서태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팬들은 서태지숲을 완성했고 아카이브가 오픈했고 하모니 등 여러 가지 이벤트가 있었다.
서태지는 ‘우리 여기 있어요’를 발매하고, ‘25년 후에 팬을 만나면? 커피 쏜다’를 실천하기 위해 서태지 카페를 열었다.
그곳에서 얻어 마신 커피 종이컵은 여전히 피규어 옆에 모셔져 있다.
당시 이벤트에는 타임캡슐 이벤트도 있었다.
당시엔 20주년 이벤트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25주년 앵콜공연에서 ‘우리 여기 있어요’를 한컷 한 컷 다시 보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미안하고 고맙다.

수능과 정시 입시가 끝난 겨울, 동학년 선생님들과 동유럽에 다녀왔다.
동유럽에 가면 추울까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한국이 더 추웠던 그 겨울, 밤중에 길을 잃어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체코의 카를교에서는 소원도 빌었던 시간.
참 힘들었지만, 그 학교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많은 동료들을 얻었다.

<2013년>
2013년에는 간신히 2학년 담임을 하게 됐다.
그런데 처음으로 남자반 담임이었다. 여자반 또는 합반 담임만 해보았던 내게 남자반은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 해 학생들이 많이 따라줬다.
아마 본인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많이 쏟아준다고 생각해 래포 형성이 잘 되었던 듯하다.
이런저런 사건도 있었지만, 참 많이 예뻐했고 든든한 제자들을 얻게 되는 해가 됐다.

서태지가 결혼했다.
2011년 사생활 기사로 인해 충분히 충격을 받았던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많은 팬들이 많이 무너졌다.
익명으로 운영되는 팬사이트에서 무너지는 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실제로 내가 아는 팬들도 떠나갔다.
이 해는 서태지 때문이 아니라, 우리 팬덤이 무너지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팬덤이 무너지는 원인 제공자가 서태지라서 힘들었다.
서태지가 잘못을 한 게 아닌데, 떠나가는 팬들의 마음도 이해가 되어서 힘들었다.
짧게는 10년이 넘게, 길게는 20년을 가까이 안 팬들, 나의 친구들이기에 같이 아팠다.
팬덤이 이런 식으로 산산조각날 줄은 몰랐다. 마음이 서걱거렸다.

<2014년>
나는 다시 고3담임이 됐다.
2년째 가르치는 아이들, 참 많이 예뻐했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45명이 넘는 우리반 아이들, 복잡해진 입시로 몹시 예민해져 학생들에게 잔소리도 참 많이 했다.
그 학교에서 4년 근무하는 동안 3년을 고3담임을 하면서 체력도 많이 딸렸다.

그 해 4월, 수학여행 가는 학생들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했다.
처음엔 다 구조되었다더니 첫날 오전 구조된 사람들 말고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었다.
나는 배를 타고 두 번이나 수학여행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21세기에 학생들이 저렇게 수장된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교무실에선 모두가 컴퓨터 앞에 앉아 눈물을 삼키고 있었고, 우리반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칠판에 노란 리본을 그리고 학생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 때를 되돌아보면 여전히 깜깜한 동굴이다.
아직도 가슴이 갑갑하고 눈물이 난다.

여름은 수시 입시로 바빴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수시였다.
모든 학생들의 입시상담을 해야 했고, 우리반만 스무명이 넘는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를 봐주었고, 그만큼의 추천서를 써야했다.

나에겐 현재 하나뿐인 소중한 조카가 그 여름, 7월 태어났다.
너무 예쁘고 소중했다. 그리고 두 달쯤 후, 8월말 서태지의 딸도 태어났다.
내게 너무도 예쁜 조카처럼, 서태지에게 그 딸이 얼마나 소중하고 예쁠까, 싶었다.
진심으로 축하했다.

말 그대로 입시지옥을 겨우 벗어날 무렵 서태지가 9집을 가지고 돌아왔다.
컴백콘서트는 ‘크리스말로윈’이란 이름이었고, 할로윈 또는 크리스마스 관련 복장이란 드레스코드가 있었다.
나는 할로윈에 꼭 입고 싶었던 꿀벌 복장을 구매했다.
나와 나의 매냐 친구들은 컴백콘서트 당일 9집 앨범 구매를 위해 일찍 공연장에 도착했다.
내 차에서 9집을 재생하던 우리는 ‘비록’에서 멈췄다.
‘90’s icon’, ‘비록’ 등의 가사를 읽어보던 우리는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모아이로 시작한 9집 컴백 콘서트에서 그는 많이 긴장한 듯했다.
9집의 ‘잃어버린’, ‘프리즌브레이크’ 등은 아직 낯설었고, 그간 공백기의 여러 시련들로 우리 역시 마음이 허전했다.

컴백콘서트가 10월 18일이었는데, 10월 27일에 마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응급상황일 때부터 기사가 떴고, 나의 인생의 한 축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사망은 너무 큰 슬픔이었다.
신해철은 서태지에게도, 많은 서태지 팬들에게도 가까운 인물이었다.
마왕이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밤 서태지는 ‘슈퍼스타케이’에 잠깐 출연하여 눈시울을 붉히고, 마왕의 장례식에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아직 할 일도, 나눌 추억도 많은 나의 또 다른 영웅이 그렇게 세상을 떴다.

안타까운 일이 있었지만, 9집 활동은 조금씩 이어졌고 긴장감도 해소되기 시작했다.
마왕이 세상을 떠난 후 바로 있었던 ‘유스케’ 사전녹화는 당첨되지 못했다.
수능 전 날 있었던 엠넷 사전녹화 역시 추첨에서 떨어졌지만, 구제되어 갈 수 있게 됐다.
수능 전 날이라 일찍 나올 수 있었던 나는 상암동까지 달려 사전녹화를 보고, 다음날 새벽 수능장으로 달려가 수능 보러 가는 학생들을 응원했다.
12월말엔 SBS 가요대상 녹화가 있었다. 선착순으로 표를 배부했던 녹화에 3학년 담임들 모두 함께 하는 등산 후 바로 달려가 참석했다.
해외에서 했던 마마에는 가지 못했고, 평창동 원정대 역시 떨어졌다.

팬사이트는 8집에 인기있었던 위드태지보다 디시인갤러리 안에 있는 서태지갤러리가 더 붐볐다.
그곳에서 9집 이벤트로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수능이 끝나고 시간이 생긴 나는 종이학을 접기 시작했다.
2014년 12월까지만 접기로 다짐한 나는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7,221개의 종이학을 접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팬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2014년 12월말 ‘콰이어트 나이트’ 전국투어가 시작됐다.
나는 다시 올출을 결심했고 전국을 누볐다.
서태지는 점점 팬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나도 부산에서 서태지의 손을 스치는 행운을 얻게 됐고, 당시 서태지의 손은 정말 따뜻했다.
나는 당시 부산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갔는데, 나는 공연을 가고 엄마와 동생은 부산 여행을 한 후 숙소에서 만났다.
숙소에서 서태지와 처음 손을 잡은 날이라고 건배를 했다.
생각해보면 나의 팬질엔 늘 가족의 정서적 지지가 있었다.
전국투어는 2월의 마지막날, 3월의 첫날 앵콜로 마무리되었다.
전국투어 기간 동안 출근길도, 퇴근길도 보게 되는 행운도 있었고,
책을 구입해서 김실장님을 통해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명견만리, 생일파티 클럽 공연 등도 있었다. 생일 파티 클럽 공연은 홍콩 여행으로 가지 못했다.
클럽공연을 즐기게 된 서태지는 3월에 뒷풀이 클럽공연도 했다.
남탕, 여탕, 혼탕이라는 이름으로 재미있는 컨셉의 공연에서 그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자연스럽게 팬들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해 3월부터 나는 다른 곳으로 출근했다.
나는 2년간 외국어교육원 파견 교사가 되었다.
학교와는 하는 일도 달랐고, 한국인 교사보다 원어민 교사가 더 많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하며 미국, 영국, 아일랜드, 호주, 남아공 등 다양한 국적의 원어민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나는 사고가 넓어지고 다양해지는 기회를 얻었다.
가르치는 아이들도 달랐다.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했던 나는 초등학생,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보게 되었고, 새로운 교수학습 방법을 배웠다.

이제는 공백기에도 한 번씩 봤으면 좋겠다는, 락페에 한 번 나왔으면 좋겠다는 팬들의 소망도 이루어졌다.
서태지는 펜타포트 공연에 참여했다.
서태지의 팬들뿐 아니라 펜타포트에 온 일반인들도 모두 서태지의 공연을 함께 즐겼다.
이제 서태지의 음악 인생이 또 다른 단계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태지도, 서태지 팬들도 모두 조금씩 빛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께 성장하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펜타포트 뒷풀이로도 클럽공연을 했다.

10월엔 청주 카페 친구들과 함께 마왕 신해철이 계시는 곳에 갔다.
15년 1주기, 16년 2주기에 들렀고, 17년에도 들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키운 이에게 1년에 한 번 인사를 하고 있다.

<2016년>
나의 외국어교육원 생활은 늘 비슷했다.
들어오는 학생들을 맞고, 가끔은 원어민들의 파티에 놀러갔다.

서태지컴퍼니 김민석 이사가 새로운 도전을 했다.
서태지의 음악으로 뮤지컬을 만들었다. 창작 뮤지컬은 무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각색했다. 카뮈의 ‘페스트’를 인상 깊게 읽은 나는 기대감이 커졌다.
뮤지컬 페스트는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하지만 창작 뮤지컬 시장의 어려움에도 무대에 올리고 중간중간 수정해가며 노력한 뮤지컬 페스트 팀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페스트 홍보를 위해 라디오 등에 나온 김민석 이사는 서태지와 서태지 음악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표현했다.
웹진을 할 때에도 느꼈지만 서태지의 주변에 있는 분들이 서태지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늘 고마움을 표현하는 서태지처럼, 나 역시 그들에게 감사하다.

뮤지컬 ‘페스트’ VIP데이에 서태지를 초청했다.
평일이지만 기사를 본 후 급하게 2층이지만 예매했다.
포토월에 선 서태지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었고 같은 공간에서 ‘페스트’를 관람할 수 있었다.
그렇게 16년에도 우리는 서태지를 볼 수 있었다.

2016년 겨울은 시위의 해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나도 매번은 아니지만 여러 번 시위에 참여했다.
몇 번은 서울로, 몇 번은 청주에서..
많이 추웠다. 하지만, 암울했던 10년을 생각하면 속이 터졌다.
나는 훌쩍 어른이 되어 있었고, 어른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 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2017년>
나는 다시 학교를 옮겼다.
1시간 정도 출퇴근을 해야 하는 거리이고, 처음으로 중학교에 근무하게 됐다. 신설학교였다.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여러모로 달랐다.
수업에 대한 만족도는 고등학교가 높지만, 중학교는 야간자율학습을 안해도 되는 근무환경이 좋았다.
체력이 좋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고, 어린 학생들이 예쁘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는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9월초 서태지 25주년 기념공연이 있었고, 9월말 서태지 25주년 기념공연 앵콜이 있었다.
9월초에 시작한 이 글을 앵콜이 끝나고 나서야 맺는다.
서태지와 함께한 나의 25년을 정리하면서 내게 든 생각은 ‘내 인생 별 것 없는 줄 알았는데,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았네’였다.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서태지 팬질이 마냥 행복한 일로만 가득차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25주년 기념 공연 앵콜에서의 서태지를 보고 오니, 정말 우리는 ‘오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어렸을 적 영웅이었던 서태지 덕분에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고
내 인생은 매우 다채로워졌으며
그리고 가장 소중한 친구를 얻었다.
이 친구와 함께 할 앞으로의 내 인생도 참 많이 기대가 된다.





P.S. 지난 긴 세월 동안 고마웠어요, 태지 오빠.
오빠의 25년, 그리고 나의 25년
흐른 시간만큼, 쌓인 시간만큼
또 다시 진행되고 있는 미래도 함께 잘 살아보아요.
소중한 시간 떠올리면서 주저앉지 말고.






  목록보기   추천

이전글나의 오랜친구.. [2]
다음글대문에 감동해서 글씁니다 [2]바람의노래

Copyright 2000-2017 Taijiman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