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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분열증에 빠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김태서  2009-08-23 15:36:25, 조회 : 689, 추천 : 119

'서태지, 분열증에 빠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김태서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서태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사람이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서태지에 대해 '애증'이라 표현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태지는 한국 가요(혹은 그런 게 있다면 '주류 록')계의 '한계'임과 동시에 '대안'으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원인은 그가 지극히 '분열증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서태지가 '분열증적'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이 점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자.
서태지와 아이들 그룹 활동 시절, 서태지에 대한 평가는 많은 의혹들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 일색이었다. 혹자는 이들이 데뷔당시 모 방송국의 신인가수 평가 코너에서 '평론가 나부랭이'들의 박한 평가를 받았다는 점과, 지나친 '상업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평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표절의혹' 등을 들어 서태지가 '박해'를 받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평가는 그의 성공 신화에 '인간 승리' 식 휘장을 둘러주었을 뿐 결정적으로 '음악인 서태지'에 대한 저 평가를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다(데뷔 당시부터 계속 그를 따라다니는 비난인 '표절'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어떤 견해를 밝히고 싶지 않다. 그것은 '몇 마디 이상이 똑같으면 표절 인정'이라는 법률조항으로도, '내가 듣기엔 어떻더라' 식의 판단으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서태지가 표절의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룹 시절 서태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는 '진취적인 음악인'으로, 그리고 생소한 음악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조리할 줄 아는 '실력 있는 연예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산과, 2년만의 컴백 솔로 데뷔작인 [Maya](1998)의 발매를 기점으로 서태지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 쪽에도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다. 우선 해외음악의 최신 트렌드(trend)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점차 늘어나면서 서태지의 음악이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단지 미국의 최신 록 음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렇듯 지나친 '최신장르'에 대한 집착이 그의 음악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지적 또한 대두되었다. 또한 언론을 대하는 태도와 음반 슬리브(sleeve) 등에서 드러나듯 지나친 '신비주의 전략'을 취한다는 비판과, 기존에 일구어 놓은 팬 층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음악을 한다는 평가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사기성 짙은 음악인', 그리고 '더 이상 신선하지 못한 연예인'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조금은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서태지의 중구난방식 음악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얘기하자면, 서태지는 데뷔 당시부터 일관되게 '록'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을 기반에 두고 있었다. 국내 댄스 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음반 [난 알아요](1992) 같은 경우에도 작곡의 기본은 분명 록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의 음악은 록과 댄스, 혹은 록과 힙합의 혼성교배에서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록의 비중을 확장하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모습이 이미 충분히 상업적으로 검증된 미국의 최신 록 경향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 시도 자체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지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서태지의 '유행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녹슬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는 하드코어(hardcore, 혹은 뉴메틀(nu-metal)) 사운드에 대한 매니아적 취향을 정교한 공예품처럼 만들어낸(그래서 장르 본연의 야성적인 맛은 반감된 감이 있는) [울트라매니아](2000)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었다. "울트라매니아"나 "오렌지", "인터넷 전쟁" 같은 곡을 '노래방에서 뻘쭘해지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만들어내는 재주는 분명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같은 계열의 닥터코어911이나 피아(Pia)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서태지는 '대중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사냥꾼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얘기가 조금 복잡해진다. 서태지의 딜레마는 '록 이데올로기(음악성)'에 사로잡힌 '팝 뮤지션(대중성)'이라는 점이다. 서태지의 비극은 그가 두 마리 토끼를 양손에 들고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를 끊임없이 고민 중이라는 데에 있다. 서태지의 머리 속에서 '실험적이고 음악성 있는 음악으로서의 록'과 '대중들이 사랑하는 음악으로서의 팝'은 '도식화' 되어 그를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서태지의 음악을 통해 드러나는 '분열증적' 모습의 정체이다.

3 년 4개월만에 발표한 솔로 3집 [7th Issue](2004) 역시 이렇듯 분열증적인 서태지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음반은 기자회견에서 그가 밝혔듯이 '좀 더 대중적인'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솔로시절 그가 만들어낸 가장 명징한 멜로디라인의 "Take 5"(재미있는 점은 이 곡이 그의 가장 내면적이고 편집증적이었던 [Maya]의 수록곡이라는 점이다)를 연상시키는 "Haffy End"나 "Victim", 그린 데이(Green Day) 류의 발랄한 오이펑크(Oi-Punk) 사운드의 "Live Wire", 오랜만에 만나는 서정적인 멜로디의 "로봇"과 "10월 4일" 등, 과연 그의 말대로 '대중성'이라는 측면에 대해 충분히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태지가 결코 '사운드'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은 아니다.
거의 전 곡에 걸쳐 각각의 연주 파트는 자신의 결을 그대로 살린 채 여러 겹의 소리 층(layer)를 쌓아간다(서태지는 편집증적으로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각종 샘플링(sampling)과 현악 사운드가 얽혀들며, "Zero (0)" 같은 곡은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prog-rock)적인 성격마저 띠고있다. 또한 사이사이 삽입된 '간주곡'에서도 그의 음향에 대한 집착은 계속된다. 약간은 뜬금없는 "DB"의 (잘게 쪼갠 브레이크 비트(break beat)로서 최신의 테크노 조류 중 하나인) 드릴'앤'베이스(drill 'n' bass) 리듬은 이어지는 단조로운 펑크 사운드의 "Live Wire"에서 재활용되고 있으며, 둔탁하게 반복되는 기타리프의 "Down"은 서정성을 강조한 "10월 4일"을 지나 (전작의 "오렌지"에서 랩 파트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F.M Business"의 거친 하드코어 사운드와 조응을 이룬다.

그렇다면 이러한 멜로디와 구조적으로 쌓아올린 사운드는 조화를 이루어내는가? 결과는 긍정적이지 못하다. [7th Issue]의 멜로디와 사운드는 서로 융화를 이루지 못한 채 '물리적인 결합'에만 머문다. 이는 음반을 듣는 중에는 인상적인 선율이 귀에 꽂히지만 재생이 끝난 후 어떤 멜로디를 들었는지 기억하기 힘들다는 얘기이며. 충분히 공을 들인 사운드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과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과도한 장르활용(그런지, 하드코어, 앰비언트, 드릴'앤'베이스, 프로그-록 등)은 음반에서 끊임없이 각각의 특성을 돌출하여 충돌을 일으키며 멜로디의 전달을 가로막는다. 오히려 유행가로서의 기능은 [울트라매니아] 시절보다 떨어졌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언제나 서태지 음악의 절대과제였던 '팝과 록의 절충'에 대한 강박은 [7th Issue]를 통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시점에서 '록'과 '팝'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점은 알고 있다. 록이 항상 '음악성'을 중시하는 음악이었던 것은 아니며, 대중음악의 진보가 록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던 것도 아니다. 또한 팝은 결코 싸구려가 아니며, 록 또한 팝의 영역 안에서 사고가 가능하다는 점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서태지 본인은 이러한 점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팔리는 가요를 만들어야 하는 서태지'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하고 싶은 서태지' 간의 괴리를 노래한 "F.M Business"는 이러한 그의 현 상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서태지의 이러한 분열은 그 자체로 이미 '한국적'이다. 이는 록이 한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강령화'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잘 알다시피 서태지는 80년대 헤비메틀 1세대 밴드인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데뷔했다). 이것은 서태지를 비롯하여 (실상 록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김경호, 김장훈, (심지어는) 문희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록'에 대한 집착의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서태지가 떠 안아야 할 문제만은 아니다. 그는 단지 한국 음악계의 '기형적'인 토양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켰을 뿐이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이 모든 것을 잘 해냈다.

하지만 서태지가 그의 음악으로 한국 가요계의 문제점을 타파할 것이라는 기대(가요계를 살린다는 것이 '가요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라면)는 너무 순진한 생각인 것 또한 사실이다. 서태지의 음악 자체가 이미 한국 음악계의 모든 '모순'을 축약한 것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직설적으로 말해서, 여전한 상업적 위력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의 '전성기'는 지나버렸다고 할 수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가 국내 음악계에 가져온 변화만큼이나 그를 둘러싼 가요계의 상황 역시 변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의 음악이 갖는 성격 자체가 좀 더 '내향적'이고 '개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 역시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서태지가 지금의 가요계에서 갖는 가치는 무엇인가? 위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서태지가 현 가요계의 '한계'임과 동시에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가요계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를 만들어냈고, 또 그가 공고히 한 기형적인 가요계의 모습은 이미 한국적인 특수성을 띈 토양을 형성했고, 서태지 이후의 다음 '무언가'가 등장한다면, 그 역시 이러한 토양 위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서태지에 대해 갖고 있는 '애증'의 정체이며, 그리고 서태지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 대해 조급해 하면서도 일단은 결론을 내리기를 꺼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태지는 분명 한국적 토양에서 음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해외에서 수입된 음악이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받아들여지는지)를 한 가수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태지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되리라는 섣부른 기대에 다름 아니며, 나름의 의미를 가진 서태지라는 가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과중한 짐을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는 '서태지 이후'의 무언가가 등장해야 할 단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태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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