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비평 보고서


[보도자료]

8집 서태지 일부 비평/기사에 대한
메타비평 보고서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선결론 후짜맞추기 식의 억측기사
3) ‘기사/비평 으로서의 가치’ 를 잃은 기사
4) 문화대통령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것
5) ‘서태지와 진보논쟁’이 나아갈 방향점
6) 음악마케팅 논쟁의 해법
7) 맺음말

-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서태지매니아 일동
(http://www.taijimania.org)

들어가는 말

" 2008년 문화에 있어서 진보란 과연 무엇인가
기사와 평론의 가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저희는 문화와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서태지 매니아입니다.

서태지의 8집 싱글앨범 발매를 전후로 각종 매체에서는 평론과 기사들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서태지에 대한 호감/비호감 혹은 옹호/비판을 넘어서 서태지 음악비평에 대한 논의가 왜곡, 편향되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음악평론에 대한 메타비평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메타비평은 비평자체의 기본전제나 논리적 구조를 주제로 비평에 대한 비평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평에 대한 비평입니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나오고 있는 2008년의 음악평론은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이미 놓쳐버렸습니다. TV, 영화,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분야를 자유롭게 오가며 의견을 내놓던 문화계 종사자들이 어느 가수의 신보가 나오면 ‘대중음악평론가’의 이름으로 비평 작업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음악담론’에 대한 정밀한 논의는 퇴색해버리고, 대신 주관적인 시각과 음악 외적인 요인들로 평론의 내용을 엮어냅니다. 이는 ‘미디어 권력’을 가진자들에 의해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널리 유포되고 있습니다.

특히 소위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는 매체들은 무비판적으로 위험한 비평의 생산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서태지=권력자’의 등식을 설정이라도 한 것일까요. 지극히 사적이고 편향된 논리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무비판적으로 보도하여 대중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서태지 비판에 서태지 음악은 없습니다. 평론가의 새 앨범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과 진지한 고찰은 없고 뭉뚱그려 비난일색 아니면 칭찬일색, 그도 아니면 모호함으로 일관합니다. 혹여 진보매체에서는 ‘삐딱한 시선’의 비평을 ‘진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기본 전제와 기본 가치들을 재검토해 나가지 않고 일방향의 편향된 논리를 계속 확대재생산해 나가는 것은 언론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서태지 매니아는 서태지 비평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서태지 비평의 논리적 구조의 허점을 파헤치고, 그것이 어떻게 문화계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분석할 계획입니다. 그럼으로써 안이한 문화비평의 자성을 촉구하고, 진정한 ‘진보’가 이뤄지는데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메타비평을 시작합니다.

2008. 9.27. 서태지매니아

1. 선결론 후짜맞추기 식의 억측기사

오마이뉴스는 9월 24일자 ‘서태지 공연측, 떳떳하면 '계약서' 공개하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톱에 배치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홈페이지에 실린 공연 일정에는 서태지 공연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도 않다는 것, 따라서 한국에서 공연할 '로열 필하모닉'은 영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오케스트라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다....서태지 공연측은 의혹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면 그냥 계약서만 내보이시라. 대중은 똥이 아니다”라고 마무리된다.(오마이뉴스 기사내용 中 일부)

이 기사는 이미 ‘서태지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증명해가다가 감정이 폭발해버리는 ‘자가발전형’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기자가 진정 우리나라의 성숙한 공연문화를 소망하고 공인의 윤리의식을 바로잡고 싶었다면, 그러한 대의적인 차원의 사명감에서 의혹을 제기했다면, 로열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연락해 ‘사실’을 확인하는 기본절차는 거쳤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외려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대신 뜬금없는 드라마 스토리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하면서 논점을 흐렸다. 깊이 있는 탐사보도 대신 모호한 추측과 블편한 감정적 언설로 내용을 채웠다.

전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에 '서태지가 가짜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할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발상 자체가, 웹2.0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을, 그의 표현대로 ‘똥 덩어리’로 무시한 행태라고 봐야할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팬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로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측과 접촉을 해봤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림>을 통해 '하단기사'로 고지했다.

“23일 기사가 비유 등을 통해 "가짜 로열 필하모닉이 오는 것 아니냐"는 뉘앙스로 보도돼 오해를 유발한 점에 대해서는 공연을 준비한 주최 측과 서태지 팬들에게 사과드립니다. 계약관계와 관련해 명확하게 확인보도 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본문中)

하지만 서태지 심포니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훼손되었다. 공연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으로 인해 '세계적인 지휘자 톨가와 함께 하는 록과 오케스트라의 만남'이라는 서태지심포니의 '참 의미'가 알려지기보다 '서태지'란 이름에 오점만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흠집 내고 치고 빠지기식의 보도는 ‘사노련 체포’ 는 1면에 싣고 ‘영장기각’은 단신에 싣는 전형적인 보수언론의 보도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행태이다.

더욱이 오마이뉴스는 그간 일단 터뜨리고 ‘아님 말고’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 온 보수언론의 폭로저널리즘을 앞장 서서 비판해왔다. 또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자처해온 대표적인 진보언론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이러한 자기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데 깊은 분노를 표명한다.

또한 서태지만이 아니라 대다수 연예인은 미디어권력을 가진 자들의 횡포에 ‘반론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약자의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한 폐쇄적인 시스템을 이용하여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다는면 '진보언론'과 속칭 '찌라시'는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생산적인 문화담론의 장이어야 할 소중한 지면이 최소한의 인권의식과 건전한 비평의식도 갖추지 못한 자들의 비난과 한탄의 음습한 공간으로 소모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줄 견제세력이 부재한 음악평론계의 척박한 현실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저급한 저널리즘’ 풍토조성에 일조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문화담론이나 비평은 편견이 배제된 상태에서 사실에 입각하여 표면보다는 이면을 보는 깊이 있는 시각으로 '생산적인' 논의를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극적인 논쟁만 일으키고 반복하는 행위가 진정 누구에게 이로우며 무엇을 위한 행동인지 숙고하고 판단한 후에 평론가는 펜을 잡아야 할 것이다.

2. ‘기사/비평 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기사

기사는 팩트를 알려주거나 독자나 대중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좀 더 세밀히 보여주거나 구조나 내용적 문제를 비판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기사부터 대중의 이해를 돕는 비평, 여러 의견을 생생히 전달할 수 있는 대담등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을 것다.

그런데 그러한 기사의 기본전제를 훌쩍 벗어나버린 수준이하의 기사가 시사인/elle/프리미어 까지 연이어 실렸다. 주장의 논리구조를 보여주지 않은 편향된 가치판단은 위험수위를 넘었고 인격모독과 선정적인 표현이 여과되지 않은채 그대로 보여졌다.

“너네별로 돌아가”“난 매몰차게 말할 수 있어. 서태지는 본질이 없어.”
“이효리의 몸매와 눈웃음은 즉각적인 쾌락을 주지만 이스트섬 얘기는 꿈과 상상은 커녕 오타쿠 정서야.”
“실패한 대통령이 다시 정치를 한데. 좀 잠자코 있어나 줬으면 싶다는 느낌?”
“애정 결핍 환자 같아” ”난 서태지가 자아도취 환자 같아“
”세월이 가도 상태만 더 나빠질 거 같아.“
”난 서태지가 사라져줬으면 좋겠어.“ “그냥 이대로 역사에 기록되었으면 좋겠어.”
(프리미어/ELLE 기사中 일부발췌 -허지웅,신기주)


또한 이런 기사가 버젓이 활자화되었다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피드백이 연일 터져 나왔는데도 같은 내용이 다른 매체를 통해 반복돼서 대중에게 전해졌고, 우려 섞인 비판의 수천의 피드백 중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피드백만이 다음 호에 실렸다.

우리가 가장 지적하고 싶은 것은 ‘팬들과 의견이 다르다’라는 점이 아니라 기사로서의 가치를 의심하게 만드는 편향되고 선정적인 시각이 다름아닌 문화평론가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비평에 기사의 자격을 부여한 각 매체들의 데스크를 주목한다.

이 대화형식의 기사에서 다루어졌던 주제자체는 다양한 이견이 실재 존재하고 토론의 꺼리도 될 수 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다루어지고 있는 전제와 방식은 기사로서의 기본 가치를 잃고 있다. 미디어매체에서 대상에 대한 비평은 가능하지만 비난은 지양되어야한다. 왜냐하면 비난은 비평이 전달된 대중의 2차적 감상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매체가 비평이 아니라 비난을 한다면 그것은 대중을 향한 일방향의 폭력이 될 수 있기에 문화미디어권력이 가장 주의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열 번 양보해서 그 비난이 기사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으려면 그 비난으로 인해 대중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이 제시될 수 있거나 대중문화의 발전적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기사들에서 비난은 사적 취향의 표현 내지는 개인적인 감정의 배설로 느껴질 뿐이다.

해당매체의 데스크는 좀더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눈으로 이런 문제를 다루어야 할것이다.

3. 문화대통령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것

소모적 논쟁의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냐 아니냐” 이다. 문화대통령이란 말은 문화적 독재와 획일화를 탈피하기 시작하던 90년대에 대중과 언론이 만든 수식어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년이 훌쩍 지난 2008년에까지 이 구시대적인 잣대로 논쟁을 부추기고 있는 것 또한 여전히 언론이다. 모 포탈에서는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냐 장사꾼이냐‘를 투표하게 했고 모방송사에서는 ’서태지가 문화대통령이냐 아니냐“라는 끝장이 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부추겼다. 이런 미디어발 문화대통령논쟁이야말로 서태지카드로 이목을 끌어보려는 비즈니스 카드에 다름 아니다.

이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비평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구시대적인 테마의 현시대로의 무리한 적용’ 이라는 모순을 해소하지 않은 체 필요에 따라 습관적으로 사용되고 있어 오히려 논쟁을 제공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2008년의 문화는 취향에 따라 각자가 소비하는 것이 되었기에 한사람이 오랜 기간 문화시장을 장악한다는 논제 자체가 자기모순적이다. 자신이 바꾼 토양을 스스로 또 바꿔야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서태지 스스로도 “솔직한 해답을 갖자 영웅이란 존재는 더는 없어 이미 죽은지 오래 무척 오래 (6집 울트라매니아 中)” 라고 2000년에 이미 분위기파악을 했는데도 미디어와 평론에서는 문화대통령이라는 구시대적 잣대로 소모적 논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와 비평계는 좀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에서 서태지론이 논의되어지는 지점을 직접 찾아야할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자주 나오는 ‘퇴임한 문화대통령’론은 사회적 영향력에 더 주목하면서 정작 음악자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비평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더 이상 저항도 젊음도 무의미한 시대에 서태지는 무엇을 노래할 지 모르고 있다. 그저 낯선 자동차 광고에 나와서 천재끼를 부려보는 것 정도다. 퇴임한 대통령은 초라하다.(프리미어/신기주)
“분명한 사실은 서태지가 이미 어떤 지점을 관통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를 비판하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혹은 숭배하는 것도 그의 현재 위치를 바꾸거나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한겨레21/차우진) 사후적인 평가로 서태지가 혁신적인 문화 생산자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은 그가 글로벌한 대중문화의 전파자일 때였다. (한겨레21/차우진)

시대의 변화에 괴로워하는 것은 상황의 변화에 연연하지 않고 음악에 올인하고 있는 서태지보다, 당연한 변화를 비판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비평가들 자신이 아닐런지...이는 퇴임한 전 대통령이 낙향해서 소통의 민주주의를 실현시켜보려는 시도조차 막아나서는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의 시각과 참 비슷하다. 혹여 시대가 변하고 대중이 부여한 문화대통령이란 그 지위에서 퇴임했다손 치더라도 자신의 꿈을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에서 실현시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불편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짓밟아버리려는 것은 문화 발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비평가들의 시각은 시대착오적이고 과거지향적인 테제안에 자신이 머물고 있다는 반증이다. 영웅이 아니어도 영향력이 작아져도 꿈을 꾸는 자는 행복하다.

4. ‘서태지와 진보논쟁’이 나아갈 방향점

‘서태지는 진보인가’ 일부 평론가들은 서태지가 ‘진보’를 버렸다고 말한다. 비판의 논지는 이렇다.

서태지는 <교실이데아><발해를 꿈꾸며><시대유감> 같은 교육, 통일 등 사회비판적 메시지가 드러난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수십 억짜리 CF에서는 ‘진보를 향한 열정’이란 말을 입에 올렸고 이는 모순이며, 과거의 진보 이미지를 우려먹는 것은 옳지 않다 (기사예시 - 강명석/매거진T, 김작가/시사인).

이들의 말대로 서태지는 진보를 말할 자격이 없을까. 혹은 진보를 버렸는가. 이에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물어야할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이 시대에 진보란 무엇인가?” “뮤지션의 진보는 무엇으로 발현되는가?” 서태지 진보논쟁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지금 우리시대에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소구되고 있는지 정리하고, 음악에서의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보자.

지금은 21세기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체제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함께 이념논쟁도 안녕을 고했다. 거대담론보다 개인의 욕망이 화두가 되었다. 진보운동진영에서도 노동, 민족, 통일 등에서 벗어나 생태와 자연, 여성, 평화 등의 테제를 아우르며 생활 속의 진보 운동을 펼치고 있다.

시대정신은 달라졌는데, 20세기 이념의 잣대로 21세기 서태지의 음악을 논하는 것은 이미 편향된 평론을 예고한다.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대한 고려 없이 이념의 흑백논리로 서태지의 음악을 재단하는 한, 가요계의 '혁명아’가 이제는 '저항을 놓아버렸다’는 빈곤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애초에 서태지는 혁명을 노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태지는 음악에 미쳐 고교를 중퇴한 제도교육의 문제아였고 가출한 경험도 있다. 그것이 3집 <교실이데아>로 4집 <컴백홈>으로 탄생했다. 데뷔한 후에도 뮤지션으로서의 삶은 부침이 심했다. 방송심의, 복장 규제, 표절시비 등 거대권력에 의해 번번이 음악적 시도는 좌절됐다. 그러한 경험은 솔로 5집 이후 앨범들을 통해,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록’ 정신으로 구현됐다.

5집 <테이크2> “깡통 같은 자식들 내 마이크에 누가 껌을 붙여 놨어.” 6집의 <탱크>“위선 가득한 탱크에 나 작은 충격을 짓눌린! 가치! 감춰진! 깊이! 혼돈 내 가치상실 혼돈 내 창조는 가치 없던 상처 가득 찼던 난 침묵했었고” 7집 “더 많이 팔기 위한 섹션 체계적인 시스템 그리고 아이템 멈춰버린 네 시선의 초점 거품 가득한 네 민첩한 프로모션”

서태지 1집부터 8집 새싱글까지 그의 모든 음악을 관통하는 정신은 이것이다. ‘삶에 대한 사랑’ 즉 그것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삶의 자세이고 태도이다.

진보를 이념으로 재단하는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건 진보가 삶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고 고민하는 사람의 가슴에선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온다. 뮤지션에겐 그게 음악의 뿌리가 되는 거다. 그러므로, 서태지의 진보를 논하기 위해서는 음악에 대한 실험성과 창의성, 메시지, 기술적인 면-사운드녹음기술, 편곡, 연주, 공연수준 등 '음악고유의 영역'에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시대를 사랑하는 것은 모두 진보다. 그런데, 시대에 대한 사랑을 저항의 언어로 채택한 것만 진보라고 못박아버리면 저항가요만 진보적인 노래가 된다. 그런 관성에도 저항할 줄 아는 게 진보다.

서태지는 스스로 ‘진보에 대한 열정’ 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이는 음악에 대한 자신감에 근원한다. 서태지 팬들은, 어제의 자신을 넘어서서 새로운 음악을 실험하고 창안하여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음악장인으로서의 서태지를 깊이 신뢰한다. 그 연장선상에 ETP도 있고, 오늘의 The Great SEOTAIJI Symohony도 있다.

5. 음악마케팅 논쟁의 해법

마케팅이란 완성된 상품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에게 원활하게 이전시키기 위한 상품화 계획, 판매촉진을 위한 홍보와 광고등의 비즈니스 활동을 말한다. 음악도 음악생산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다른 상품들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경로를 따라 소비자에서 전달된다.

음악마케팅이란 음악생산자인 뮤지션으로부터 ‘음악’이라는 상품을 음악소비대중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비즈니스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 마케팅은 기업활동의 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으로 다뤄지고 있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 뮤지컬 문학등 다른 문화영역의 창작물이나 용역물도 마찬가지이겠다.

그렇다. 음악마케팅은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럽고 정당한 활동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운 논제가 유독 음악비평에서는 가치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인가? 비즈니스맨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태지는 타고난 비즈니스 감각을 가진 가수일 뿐이지 결코 문화대통령은 아니다. (중략)
이번 앨범 판매가 끝나면 또 숨으려나? 완벽한 앨범을 만들기 전에는 대중에게 가까이 갈수 없다면 ‘지독한 이기주의’다.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얼마든지 완벽한 앨범을 만들 수 있다.
대중과 호흡하라는 것이 쓸데없이 방송 프로에 나와서 떠들라는 것이 아니다. 가수니까 공연하고 노래하라는 것이다. 조용필과 이승철도 정기적으로 공연하지 않나? 이번 앨범 들어보니 뭐 그리 완벽하지도 않으면서...(데일리안/시사평론가 이병규)

이 기사의 시각이 서태지의 음악마케팅과 활동스타일을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서태지 브랜드의 가치가 음악보다는 마케팅에서 나온다는 평가로까지 이어진다.

서태지란 코드는 워낙 특수해서 일반적인 논제로 풀어가기가 힘들다. 마케팅논란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화대통령’론과도 연결되어 있고 ‘혁명가 서태지’와도 연결이 되어있고 신비주의 논란과도 연결되어 있다. ‘문화대통령이라면...’ 하는 기대와 ‘진보와 혁명을 버리고 상업적 마케터가 되었다’ 라는 진보진영의 비평까지 비평가의 가치판단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혼재되어있는 셈이다.

이 혼재된 비평들을 정리하기위해서는 ‘음악마케팅은 자연스럽고 정당한 활동이다’라는 것을 진실로 허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활동스타일 또한 음악인 개인의 몫으로 존중되어야한다. 그리고 그 창작물인 ‘음악’에 대한 평가와 ‘마케팅’ 에 대한 평가를 엄밀히 분리해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창작의 단계와 마케팅의 단계가 있듯이. 그래야 마케팅을 위한 창작인가 창작에 복무하는 마케팅인가를 구분할 수가 있게 된다.

일부평론가의 말대로 음악은 별거 아닌데 마케팅이 현란해 과대포장 되었다 한다면 시간차가 있겠지만 음악대중은 결국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팬들도 정당한 평가라면 마케팅부분에의 비평이나(마케팅스타일이나 규모) 음악과 마케팅의 관계비평(부조화한다거나)도 허용해야할 것이다.

서태지식 마케팅을 옹호하고자함이 아니다. 음악마케팅에 대한 입장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고서는 마케팅논란은 소모적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넘어서야 고액 CF 논란이나 장사꾼논란등이 그 본질을 찾아 갈 수 있고 마케팅을 잘하면 음악가의 순수성이 폄하되는 ‘음악 순결주의’도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나를 음악사업가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팔아먹는 장사꾼은 아니다"라고 했던 서태지의 말에 대해서도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때에야 새로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맺은말

문화를 사랑하고 대중음악을 사랑하며 진정한 진보의 가치를 찾아가려하는 서태지매니아들의 메타비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